07.05.21. 설악산(1708m) 왕초보등산회 9시간40분
23:00 안동 출발 03:00 오색관리사무소 도착, 산행시작
06:10 대청봉 06:50 소청산장
06:50~08:00 아침 08:30 봉정암
11:14 오세암 11:40 만경대
12:43 영시암 13:10~13:50 점심
14:30 백담사, 산행끝
3시간10분만에 올라간 설악산대청봉 정상-모두들 사진 촬영한다고 잠시도 빈틈이 없다.
대청봉 정상에서 본 아침 안개에 싸인 공룡능선
소청봉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본 봉정암과 그 뒤 바위
만경대에서 내려본 오세암
올라가 보지않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굉장히 후회했을 만경대-공룡능선, 용아장성능 등 내설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
봉정암사리탑
봉정암의 유래-다음카페 '부처님 세상...'에서 퍼옴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3.7일(21일)기도를 마치던 날, 문수보살이 현신하시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하였다. 신라로 귀국한 스님께서는 우선 양산 통도사에 보궁을 지어 사리를 봉안하고 금강산을 찾아갔다.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으려 함이었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풍광을 돌아보며 과연 사리를 모실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사리를 봉안하려 하니 어느 곳이 신령한 장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님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이레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봉황새 한 마리가 스님의 기도처로 날아왔다. 스님은 봉황새를 따라 나섰다. 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몇날 며칠을 남쪽으로만 날아가던 봉황새가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에서 몇 바퀴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봉우리 위로 올라가자 봉황새는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봉황이 사라진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바위의 생김새가 꼭 부처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봉황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그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그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지세를 관찰하니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곳이 사리를 모실 인연처임을 깨달은 스님께서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을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사라졌다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지으니, 선덕여왕 13년(644년)의 일이요, 설악산의 사찰 암자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된 곳이다. 봉정암이 창건된 후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니, 부처님의 불뇌사리가 모셔진 까닭이다.
오세암과 백담사 중간쯤에 위치한 영시암의 유래-다음카페 '어느해 설악에서' 에서 퍼옴
영시암이 지어진 때는 조선 중엽 숙종때이다 이 때는 서인과 동인의 대립,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이다.
숙종의 비(妃) 민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런데 총애를 받던 후궁 가운데서 장소의(張昭義)가 아이를 낳았다. 숙종은 그 아이를 세자로 삼을 작정이었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반대할 것을 짐작하고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세자 책봉의 문제가 나타나자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 숙종의 나이는 29세, 민비의 나이는 23세이니 후궁에서 낳은 아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남인은 숙종의 의견에 찬성했다. 숙종은 남인의 힘을 업고 서인들을 숙청하고 남인의 정권을 형성케 했다. 이 때 숙청된 사람중에 전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있었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흡이 속세와 인연을 끊을 셈으로 수렴동계곡 깊숙한 곳에 지어 놓고 영원히 맹서 한다는 뜻으로 영시(永矢)라는 이름을 지었다.
현재 영시암은 새로 지어서 옛날의 모습은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