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민속자료 제126호(영산암)
봉정사 영산암 부속건물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해서...
영산암에는 우연적인 필연과 어설픈 해학이 있다. 초서로 '우화루(雨花樓)'라고 쓰여진 영산암 문루에 걸린 현판이 바로 영산암의 우연적 필연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화루는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연결하여 극락전을 폐쇄공간으로 만들었던 7칸 누각문에 있었다. 그런데 1969년 고금당 해체 복원 공사때 대웅전 앞마당에 있던 3칸 진여문과 이 우화루가 함께 뜯겨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 우화루의 현판이 영산암 문루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연히 옮겨진 이 우화루의 현판이 왜 진작부터 여기에 있지 않고 극락전 앞에 있었는지 도리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화라는 말은 원래 석가모니불이 일평생의 설법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법화경>의 진리를 영취산 위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이를 축복하여 꽃비를 내려 주었다는 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화와 영취산(영산)은 <법화경> 설법의 대표적 상징이 된 것이다. 우화루 현판은 마땅히 영산암과 호응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물론 아미타불이 주도하는 극락의 모임<아미타회상도>에서도 이 우화는 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화의 의장특허는 <법화경>에 있다. 엄격히 보면 <아미타회상도>에서 우화를 사용하는 것은 상표도용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관상변상도>에는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수행법과 연결시키면서 환상적인 장면을 그리는데, 이때 <법화경>의 우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아미타회상도>에서도 우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 이 부당성을 지켜보던 법신불이 고금당 해체 공사를 주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우화루를 없애게 하고, 그 의장 특허권을 되돌려 주도록 한 게 아닐까? 헤겔이 말한 이성의 교지처럼 인간에게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와 인과의 필연을 관철시킨 것은 아닐까?
(이효걸, <봉정사의 좌우협시보살 '영산암과 지조암'>의 일부분, <<천등산 봉정사>>, 학계장학문화재단,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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